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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마가복음 11:1-10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by Logos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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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왕

마가복음 11장 1절부터 10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는 고난주간의 시작이자,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곧 고난받는 메시아로 드러내시는 선언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단순한 입장이 아니라, 구속사의 정점으로 향하는 예언 성취의 행위이며, 십자가로 가는 길목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겸손과 섭리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그는 권력으로 무장한 정복자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으로 무장한 구속자이십니다. 이 입성은 영광의 시작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구속의 여정이며, 그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계획이 있습니다.

1절: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감람산, 벳바게, 베다니는 모두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지명들로, 예수님의 입성이 시작되는 배경이 되는 장소입니다. 감람산은 구약 성경에서 종말과 심판, 구원의 장소로 자주 언급되었으며, 메시야의 출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슥 14:4 참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이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입성을 매우 의도적으로 준비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과 고난의 때를 알고 계셨고, 이를 하나님의 섭리 아래 질서 있게 이루어 가고 계셨습니다. 칼빈은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그 길을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순종을 강조합니다.

2-3절: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지시하십니다. 이는 구약 스가랴서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는 행위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라는 예언은 바로 이 장면에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말이나 병거를 타는 정복자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겸손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교부 이레니우스는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이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심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겸손을 통해 진정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신학적으로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섬김의 왕권을 나타내며,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이를 성육신의 절정으로 이해합니다.

4-6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찾아 그것을 풀어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전지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분은 나귀가 있는 위치와 상황을 정확히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분이 단지 선지자나 교사가 아니라,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또한 이 장면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순종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단순한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바르트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시면서도 자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분이심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과, 그 말을 듣고 나귀를 내어준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7절: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제자들은 나귀 위에 겉옷을 얹고 예수님을 태웁니다. 이는 왕이 입성할 때 백성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바치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높이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 왕은 세상의 왕처럼 권력을 휘두르거나 호화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장 낮은 방식으로, 연약한 짐승을 타고 입성하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의 왕권은 인간의 기대와 전혀 다르며, 오직 십자가에서 완성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분의 영광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는 개혁주의적 시각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질서와 반대되는 질서 안에서 성취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8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군중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 자기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펼칩니다. 이는 고대 근동에서 왕이 도시로 입성할 때 보여주는 환영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환영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며칠 뒤 이 군중 중 일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지도 모릅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기대와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어긋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백성들은 정치적 메시아, 로마로부터의 해방자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죄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을 이루시는 구속자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대조를 통해, 진정한 평화는 외적인 정복이 아닌 내적인 회복에서 비롯됨을 강조했습니다.

9-10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군중들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시아나'에서 유래된 말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는 시편 118편에 기반한 찬송으로, 유월절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통적인 찬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메시아를 향한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 안에서 다윗 왕조의 회복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 회복이 아닌, 구속사의 완성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요한복음 18:36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왕권을 완성하시며, 부활로 그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이 장면을 종말론적 시각에서 해석합니다. 지금은 겸손한 왕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심판자요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 입성은 그 영광스러운 재림을 예표하는 동시에, 십자가를 향한 겸손한 순종의 시작입니다.

전체 결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주간의 시작이며, 겸손한 왕이신 예수님께서 구속을 완성하시기 위한 발걸음입니다. 이는 인간의 기대를 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서막이며, 우리 또한 이 왕 앞에 겉옷을 내려놓고 전적인 순종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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